2차 대전 후에는 <테일러리즘>의 계량화를 통한 합리화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 온 세상이 비인간화로 초토화되고 있었습니다미국은 이 개념을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수출했습니다.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는 과학적 관리법을 미국이 제안한 것으로 전세계에 보급된 유일한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세계 어느 곳이든 간에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만약 그들이 과학적 관리법을 공격하면, 그것이 곧 실질적으로 미국을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피터 드러커, 이재규 옮김, 경영의 실제, 한국경제신문 2006, 416쪽 참조)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전세계의 많은 기업가들이 과학적 관리법이야말로 미국기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밀이라고 믿었습니다. 큰 전쟁을 치른 후, 복구를 위해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상황에서 미국기업의 성공은 과학적 관리법이 아니었어도 성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과학적 관리법에도 불구하고 근로자관리와 노동생산성의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드러커가 놓칠 리 없었습니다. 그는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을 점잖게, 그러나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과학적 관리법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는데, 하나는 기술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 측면이었습니다.

 

첫째 맹점은 분석과 통합의 문제였습니다. 분석하는 것과 통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슈라는 것입니다. 과학적 관리법이 비과학적인 이유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은 과학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분류와 분석이 대상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것도 밝혀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눈물을 분석하면 약간의 소금기와 물이 나오겠지요. 그것을 계속 분석해 들어가면 분자 > 원자 > 원자핵과 전자 > 중성자와 양성자 > 쿼크들 > 업쿼크와 다운쿼크 >… 이것은 대단히 과학적인 분류이고 분석입니다. 이것을 다시 거꾸로 통합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눈물이 되겠죠. 그래서 우리는 눈물의 본질을 이해했나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책 중에 하나입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과학적 관리법에 내포된 더 큰 문제는 인간을 매우 빈약하게 설계된 기계장치로 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노동과정을 여러 개별동작으로 분석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노동행위는 구분동작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이 하나로 통합되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개인의 의지, 성격, 정서, 기호, 그리고 마음의 문제가 자신의 직무와 통합될 때 비로소 생산성이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은 분해된 기계부품들이 하나의 장치로서 작동하려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계도 그런데, 하물며 사람에게는 어떻겠습니까?

 


둘째 맹점은 계획과 집행을 분리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 노동의 양과 질을 계획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계획만 수립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히 꿈을 꾸는 몽상가일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계획된 일을 집행만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히 일하는 짐승일 것입니다. 계획하기와 집행하기는 하나의 직무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일 뿐이다. 이것이 별개의 직무로 분리되는 순간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드러커는 다음과 같이 적절한 예를 들어 노동의 계획과 집행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계획과 집행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음식물의 섭취와 소화를 별도의 육체에서 하기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추가로 설명하면, 섭취와 소화는 별도로 연구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생리기관들을 필요로 하고, 발생하는 질병의 종류도 다르고, 그리고 육체의 다른 부분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일단 영양분을 흡수하려면, 마치 한 직무가 계획과 집행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과 같이, 육체는 두 부분 모두 필요하다.”

(피터 드러커, 이재규 옮김, 경영의 실제, 한국경제신문 2006, 421쪽 참조)


 

이러한 맹점은,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이 어째서 기업의 노동생산성을 더 이상 높이지 못하고, 근로자들이 계량화를 통한 합리적 변화시도에 저항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근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잠재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한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테일러식의 계량화는 1시간 동안은 높은 생산성을 끌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100시간 이상의 근로시간에서는 생산성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우상이었던 박철순 투수, 그는 살아있는 전설로 박찬호 선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훌륭한 투수였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시합, 즉 눈 앞에 보이는 스코어보드에서 이겨야 했기 때문에, 감독들은 박철순 투수의 어깨를 혹사시켰습니다.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일찍 은퇴해야 했습니다.

 

숫자로 합리화하는 모든 행위가 과학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비과학적 행위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경영학과 경영실무에서 이런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바나드(Chester Barnard)의 균형잡힌 조직이론과 인간 중심적인 사상은 제2차 대전의 긴박하고도 엄혹한 상황에서 제대로 꽃필 수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선 전쟁에서 이겨야 했기 때문에 인권과 자율성, 욕망과 행복 등은 사치스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자원이나 수단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나타난 것이 있는데, 오퍼레이션스 리써치(operations research, OR)라는 개념입니다. 영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고 운송하는 합리적 방안에 관한 연구로부터 소박하게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으로 말미암아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독일군의 폭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해서 각 분야의 학자들을 불러모아 레이더(radar)나 대공화기를 가장 적정하게 배치하는 방법과 전함의 적절한 배치를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대서양에서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개발된 기법들이 전후에 기업경영에 응용되어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오퍼레이션스 리써치(OR)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공학분야에서 응용되던 것이 이제는 사회과학의 거의 전분야에서 응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OR을 의사결정을 위한 계량적 모형을 연구하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류혁신에서부터 테이터 트래픽까지, 서비스 퀄리티에서부터 인사배치에 이르기까지 안 쓰이는 곳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OR이 경영과학(management science)과 거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대전은 인류에서 계량화라는 정신적 바이러스를 유행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문명은 계량화에 기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량화 없는 문명은 불가능합니다. 누가 더 정교하게 합리화된 모형으로 세계를 설명하느냐에 의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OR 또는 경영과학은 앵글로색슨(Anglo-Saxons)이 발전시켜 왔고, 그들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20세기 후반, 지구의 대부분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계량화에 뒤처진 동북아

 

이렇게 세계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동북아에서는 오랜 동안 공자와 맹자, 주역에 의지해서 통합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적 담론은 계량화를 천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했고, 그래서 좋은 문장과 시()를 중시했습니다. 전쟁에서 동북아 역시 앵글로색슨에게 졌습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었고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치욕을 만회하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그들이 추구했던 합리화의 계량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가장 먼저 추구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산업을 철저하리만큼 계량화시켰습니다. 공산품의 품질에서 그 성과를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산업의 모든 공산품을 철저하게 계량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계량화라는 것은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계량화의 질서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베푸는 어마어마한 편익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반복하지만, 계량화란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의 통일된 질서가 사라지면 일상생활은 매우 불편해지고 비효율적이 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예전에 수도꼭지를 트는 방식이 서로 다른 집과 사무실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곳에서 수도꼭지를 눌러야 할지 뽑아야 할지 몰라서 번번히 실수를 했습니다. 집에서는 꼭지의 레버를 위로 올려야 물이 나오고, 사무실에서는 아래로 눌러야 나옵니다. 이상한 건물에 가면, 꼭지를 하도 기묘하게 만들어놔서 어떻게 해야 물이 나오는지를 몰라서 잠시 당황한 적이 꽤 많습니다. 도무지 질서가 잡혀있질 않습니다.

 

건물에 들어갈 때도 어떤 곳에서는 왼쪽을 당겨야 열리고, 어떤 곳에서는 오른쪽을 밀어야 열립니다. 어떤 곳에서는 왼쪽 문을 개방해놓고, 어떤 곳에서는 오른쪽 문을 개방합니다. 문을 열 때마다,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헷갈립니다.

 

우리나라의 교통신호등과 도로표지판이 정말 개판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언급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거의 모든 운전자들이 정지선을 밟고 올라서도록 유혹하는 위치에 교통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미 10여 년 전에 나의 첫번째 책 『똑똑한 자들의 멍청한 짓 한국 관료조직의 개혁을 위한 진단과 처방』에서 교통신호등의 위치에 대해 상세히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관료들의 답변은 그렇게 바꾸기에는 너무 많은 예산이 든다고 발뺌을 해오면서 아직까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신호등이 운전자들을 잠재적 법규위반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울러 도로표지판 체계도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믿고 갔다가는 운전자가 반드시 낭패를 당하게 만들어놨습니다. 철저하게 합리화하고 철저하게 계량화됨으로써 질서가 잡혀있어야 할 영역인데도, 그렇게 되지 않아서 많은 불편과 비효율을 발생시킵니다.

 

혹시나 이 블로그에 쓰인 여러 글을 읽으면서 내가 계량화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류의 풍요로운 삶은 계량화를 필요로 합니다. 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와 살고 있는 집은 모두 계량화에 기초해 있습니다. 계량화 없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물을 철저하게 계량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계량화 해야 할 것 vs. 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런데, 문제는 계량화해야 할 것과 계량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계량화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과연 인간의 정신에까지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의 마음은 계량화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촘촘한 그물이라도 물이나 공기를 건져 올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도덕의 문제는 계량화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과 정신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짓은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는 행위입니다. 누군가 말했죠, 도덕을 법률로 규제하면 억압이 된다고.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인류의 영혼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처참한 말로를 맞았고 문명의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적 발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두뇌를 IQ로 재려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세월이 지나고 나니 얼마나 허망한 잣대였는지도 이미 잘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의 능력을 억압하는 모든 행위가 재앙을 맞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다루는 교사들에게 성과급이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그들의 마음과 행동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비도덕적이고도 반인륜적인 행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문제를 다루는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계량화의 잣대로부터 자유롭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잘 가르치도록 유인하는 기제의 하나로 교사들에게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에 대한 등급화와 서열화 평가가 불가피합니다. 여기에서 계량화가 개입됩니다. 이런 계량화는,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교사들의 영혼과 정신을 돈에다 팔아버리는 결과를 낳게 할 것입니다. 전혀 엉뚱한 것을 계량화하고 있으며 전혀 엉뚱한 것에다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는 셈입니다.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교육문제와 관련해서는 추후에 별도로 논의하려고 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말이 나온 김에 교육관료들의 사고와 행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해 두려고 합니다.

 

계량화의 바이러스가 경영학을 점령하다

 

이제 다시 경영학으로 돌아옵니다. 2차 대전 이후에 전세계는 계량화의 몸살을 알았습니다. 모든 사회과학은 계량모형으로 실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학문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학적인 또는 통계학적인 증거를 들이대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경영학의 모든 영역도 계량화에 매진했습니다.

 

회계학이나 재무학, 경영과학 등에서의 계량화는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 분야는 아직도 계량화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고, 학자들은 더욱 힘을 써서 계량화의 진보를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볼 때, 회계학은 경영학의 각 분과학 중에서 가장 낙후된 분야입니다. 회계자료가 회사의 가치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정보비대칭성은 단순한 금융과 크레딧리스크(여신위험)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2007년부터 서서히 시작된 금융위기는 사실 회계학의 문제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재무제표가 기업의 가치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회계학적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회계학자들과 회계사들은 돈에 팔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자신의 앞가림이나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인사관리분야에서도 계량적 연구를 중시했습니다. 채용에서 퇴출까지 모든 인사업무의 합리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은 계량화가 전제였습니다. 조직구성원의 정신과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인사관리에서는 계량화에 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계량화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고 사물화(事物化)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식 인사관리는 과감하게 계량화를 시도했습니다. 실증할 수 있는 방법은 계량화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과관리(performance management)에서 계량화를 추진했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숫자로 표시되는 성과목표를 설정하고 그 결과도 숫자로 평가하여 숫자로 보상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숫자로 표현하도록 시도했습니다. 이런 계량화 작업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기를 맞이합니다. 성과관리를 위한 숫자들을 기업전략으로도 연결시켰습니다.모든 전략과 전략실행이 숫자의 연쇄로 엮어지도록 만들어 기업체에 팔았습니다. 그가 바로 회계학자였던 하버드대학의 로버트 캐플란(Robert S. Kaplan, 1940~) 교수였습니다. 그는 인간과 조직에 관한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회계학자였습니다. 그가 성과관리를 계량화함으로써 균형잡힌 성과지표카드(Balanced Scorecard, BSC)개념을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이것이 공전의 히트를 치는 바람에 그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 폐해는 심각합니다. 이것 또한 나중에 별도로 상세히 언급할 예정입니다.

 

계량화 바이러스를 저지하려고 노력한 드러커

 

제2차 대전 후에 나타난 이러한 계량화의 대세에 저항했던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였습니다. 그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경영학자였습니다. 바나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드러커는 전후에 컨설턴트로서 미국의 대기업들을 관찰한 후 1954년에 불세출의 명저 『경영의 실제』(The Practice of Management)를 출간합니다. 그는 여기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오늘날 읽어도 주옥 같은 내용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목표와 자율통제에 의한 관리>(Management by Objectives and Self-Control)입니다.

 

<목표와 자율통제에 의한 관리>는 그 후에 많은 후학들에 의해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왜곡이 발생했습니다. 바나드가 구성원 개개인의 직무수행과정에서 느끼는 충족감의 표시로서 사용했던 효율성 개념이, 후학들에 의해 나중에는 아예 투입대비 산출이라는 공학적 개념으로 왜곡되었듯이, 드러커의 목표관리 개념에도 많은 왜곡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목표관리(Management by Objectives, MbO)로 알려진 것입니다.

 


드러커가 생각했던 것은, 테일러리즘이 추구했던 합리화 또는 계량화가 가져다 주는 생산성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에 근로자 개개인에게 자율적으로 목표를 세워서 일하게 한다면 더 높은 동기를 부여하게 될 것이므로 오히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드러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목표관리의 주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명령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domination)을 자기관리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self-control)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해준 데 있다. …… 그러나 자기관리에 의한 경영이 하나의 현실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 개념이 올바르고 또 바람직스러운 것이라는 인식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이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새로운 도구를 필요로 하고, 아울러 전통적 사고방식과 관행에 있어 광범한 변화를 필요로 한다.”

(피터 드러커, 이재규 옮김, 경영의 실제, 한국경제신문 2006, 196~197)


 

드러커는 계량화의 전통과 관행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목표설정에 있어 측정기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오늘날 가장 문제시 되는 지점입니다.

 

기업의 모든 주요한 분야에 대해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측정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진정 변함없는 관행으로 정착시켜야만 한다. 그런 측정기준은 엄격하게 숫자로 표시할 필요는 없으며, 반드시 정확할 필요도 없다.”

(피터 드러커, 이재규 옮김, 경영의 실제, 한국경제신문 2006, 197)


 

합리화, 계량화, 숫자에 찌들어 있던 미국인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측정기준은 숫자로 표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확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은 스스로 목표를 관리할 때에만 비로소 효율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테일러리즘에 의해 계량화된 노동의 노예상태에 있던 근로자들을 자율적인 인간으로 해방시킨 사상가가 바로 드러커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드러커의 사상은 후학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왜곡에 왜곡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숫자 없는 자율적 인간에 대한 전제는 숫자로 쪼아대야 하는 타율적 인간관으로 바뀌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숫자로 쪼아대는 것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경영으로 알고 있고, 오히려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드러커의 노력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체스터 바나드(Chester Irving Barnard, 1886~1961)는 조직의 보편적 요소를 세 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공동의 목적
둘째, 협력의지
셋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첫째 요소인 공동의 목적은 효율성을 공학적으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왜곡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학적 효율성이란 투입산출의 비율로서 궁극적으로는 이윤입니다. 이윤에 공헌하는 것은 효율적인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비효율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하게끔 세상은 점점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숫자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숫자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요소인 협력의지도 또한 숫자로 전환되었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여 자본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자본으로 바꾸었습니다. 공동의 목적을 향하여 인적 자본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로 변환되었습니다. 위대한 경제학자와 수학자들이 모여서 합리적인 계량모델을 만들어 자본시장을 공략했지만 인간의 행위는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그들이 탄 거대한 배, LTCM는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작은 책에 담긴 사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명확성과 헌신

 

오늘은 셋째 요소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직 내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바나드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어떤 것을 강조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커뮤니케이션의 경로가 명확하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디다 대고 말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30년간의 직장생활에서 발견한 것은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사고과를 하는 조직도에 상사와 부하 사이가 명백한데, 뭐가 문제냐고 할지 모르지만, 비공식 통로가 워낙 많고, 연줄로 엮여 있어서 이것을 잘 꿰뚫지 않으면 조직에서 살아 남기 힘듭니다. 부하는 어따 대고 말해야 하는지를 눈치껏 잘 알아야 본전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이 그래서 일어납니다.

 

둘째, 커뮤니케이션에서는 권위의 문제가 개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경로가 명확하지 않아서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에 보완되어야 할 것이 권위의 문제입니다. , 모든 구성원은 누군가에게 보고해야 하고, 누군가의 부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나드는 책의 상당부분을 권위의 문제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권위의 원천과 조직 내의 조정시스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문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셋째,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한 한 직접적이어야 하며, 그 라인도 짧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간접적이고 길면 내용이 오염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오류와 오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나드는 이것 말고도 몇 가지 원칙을 더 얘기하고 있으나,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은 명확성입니다.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은 구성원들간에 서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헌신을 끌어 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나드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배울 교훈은 명확성(clarity)과 헌신(commitment)입니다. 이 두 가지가 미국식 경영의 합리화 과정에서 또 다시 왜곡되었습니다. 왜곡되는 과정은 아주 간단합니다. 명확성을 확보하는 것은 숫자로 말하면 됩니다. 그리고 헌신은 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숫자로 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숫자로 쪼아라! 이것이 미국식 경영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나는 미국식 경영을 Screwing by Number(SBN)라고 부릅니다.

 

숫자로 말하라! 이것이 현대 경영의 화두입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에서 숫자와 숫자의 조합인 그래프는 필수입니다. 정확성과 헌신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숫자는 정말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운동선수가 공을 잡기 위해 자기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은 그곳에 숫자판(scoreboard)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어떤 척도로 숫자화되는 순간, 그 척도 이외의 모든 가치는 삭제됩니다. 숫자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만든 물건이 10,000원에 거래된다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어떤 철학이 내포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연이 묻어 있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10,000원어치의 가치만 있을 뿐, 나머지 모든 가치는 사라지거나 삭제됩니다. 만약 이효리가 입던 옷의 가치는 어떨까요? 경매에 부치면 얼마가 나올까요? 1,000? 아니면 십만 원? 어떤 가격이 나오더라도 그 가격 이외의 어떤 가치도 사라집니다. 일단 숫자가 결정되면, 그 숫자 이외의 어떤 가치도 삭제됩니다.

 

영업사원에게 10억 원의 매출목표가 할당되고 나면, 그 외의 모든 가치는 사라지거나 생략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요즘은 병원에서도 각 진료과의 수입을 정교하게 원가계산을 해서 수익공헌도를 계산합니다. 각 과장에게는 그 수익공헌도를 얼마까지 높이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환자의 회전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이슈가 됩니다. 의사는 환자가 환자로 보이지 않고 돈으로 보입니다. 교수들은 논문 몇 편을 발표하고 유명저널에 게재하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느냐가 중요합니다. 평가지표에서 고려하는 수치 이외의 다른 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됩니다.

 

각급 학교의 학력도 숫자로 표시됩니다. 최근 이 숫자가 발표되었습니다. 앞으로 지역과 학교의 우열이 가려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숫자의 힘 앞에 학부형들은 또다시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부모의 빈부에 따라 아이들의 빈부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이 아니라 서서히 죽이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우둔한 권력자일수록 숫자를 통해 경쟁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내가 숫자에 빠져드는 이유

 

숫자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내 경험을 통해 잠시 얘기해보죠. 나는 작년 10월부터 이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막 6개월이 된 셈입니다. 블로그를 하려고 맘 먹은 것은 세 가지 목적에서였습니다.

 

첫째, 내 강의를 들은 학생이나 직원들과의 장기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마련하는 것

둘째, 내 사유세계와 그 결과물들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하는 것

셋째,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비교적 차분하게 기록하는 것

 

처음에는 카페를 만들까, 싸이월드를 할까 하다가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만드는 과정에서 고생을 했지만, 블로그의 세계를 차츰 이해하면서 보람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숫자입니다. 이 블로그의 오른쪽 아래에 보면, 카운터 모듈이 있습니다. 방문자 숫자가 떡 찍힙니다. 어제는 몇 명, 오늘은 몇 명, 전체 몇 명이 자동으로 계산됩니다. 처음에는 10여명이었는데 요즘은 몇 백 명 수준으로 올라갔습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신지애 선수에 대해 글을 썼더니 어떤 날은 몇 천명이 한꺼번에 몰려 오기도 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방문자 수에 따라서 광고수입도 얻을 수 있답니다. 그래서 방문자 수를 늘리기 위해서 혈안이 된 블로거들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호객행위로 방문자를 끌어 모으기도 합니다. 호객행위는 아니어도 자극적인 제목을 뽑으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하지만, 파워블로그라고 해도 광고를 달아봐야 수입은 대부분 껌 값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들 방문자 수에 목을 매는 걸까요? 그게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숫자가 우열을 가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더 큰 숫자가 더 힘이 세고, 더 매력적이고, 크면 클수록 좋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심지어 숫자가 클수록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나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 블로그는 당초의 목적을 잘 달성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의 숫자입니다. 매일, 오늘은 방문자가 몇 명인가 하고 들여다 봅니다. 숫자가 많으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숫자가 내려가면 별로입니다. 방문자수를 늘리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숫자가 큰 소위 파워블로그도 들어가 봤습니다. 이 숫자를 올리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 볼까,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들을 다루어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한 당초의 목적을 잘 달성하고 있는데, 나는 왜 방문자수에 연연해 하는 걸까? 내가 내 자신에 물었습니다.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방문자수가 많아진다고 내게 당장 유리한 어떤 것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방문자수에 신경이 쓰이는 걸까? 방문자수가 많아져 봐야, 깨알같이 쓰인 내 글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사진이나 여행기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숫자가 내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자꾸 방문자수에 마음이 쓰이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블로그에 들어가면 우선 숫자부터 봅니다. 이렇게 나도 숫자에 중독되어 가는가 봅니다.

 

왜 그럴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거기 숫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숫자로부터 초연해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숫자의 힘에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숫자에 쪼임 당하는 현대인과 바나드

 

이렇게 현대인은 숫자에 쪼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쪼임을 통해서는 온전한 헌신을 끌어낼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쪼임은 오직 긴장상태를 유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긴장상태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모든 운동의 기초는 몸의 긴장을 푸는 것입니다. 긴장이 풀려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에 있어서도 마음의 긴장이 풀려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인데, 오히려 숫자로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조직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체스터 바나드는, 커뮤니케이션은 명확해야 하고 구성원의 헌신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상은 테일러리즘의 숫자광풍에 휩쓸려 피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나드의 사상을 오늘에 되살려야 할 시점입니다.

 

 

P.S.  바나드의 사상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과급과 같은 첨예한 문제뿐만 아니라 의사결정메커니즘에서도 예지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기회에 언급할 예정입니다.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체스터 바나드(Chester Irving Barnard, 1886~1961)는 조직이 성립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 공동의 목적
둘째, 협력의지
셋째, 커뮤니케이션

일반적으로 조직의 목적과 개인의 동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바나드는 공동의 목적을 구성원에게 주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목적 달성을 위한 경영개념이 효과성과 효율성으로 분리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특히 효율성 개념을 공학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측정할 수 없는 많은 가치들이 제거되는 등 바나드의 사상이 심각하게 왜곡되었음을 살펴봤습니다.

이러한 왜곡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숫자가 주는 마력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1930년대부터 미국에 불기 시작한 국가기반시설의 확충정책도 그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공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국가정책적으로 대규모 토목공사와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공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기이고, 엔지니어가 가장 각광을 받고 또한 존경도 받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기업 내에서도 자연스럽게 공학적인 마인드가 중요하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측정하여 정답을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은 195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미국은 소련의 인공위성발사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위 스푸트니크 쇼크를 받았던 케네디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국가운명을 걸 정도로 집중적으로 투자했습니다. 과학기술에의 투자는 국가적 아젠다가 되었습니다. 유능한 인재들이 과학기술 개발에 대거 참여했고, 모든 것은 숫자로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이 당연시되었고, 숫자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넘어 정직한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테일러의 사상에 기름을 부은 것과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하여 정확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숫자가 서서히 이데올로기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회과학적 연구의 모든 주장이나 판단은 반드시 숫자나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행위도 계량화하여 숫자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계량경제학이나 계량경영학이 중요해졌습니다. 수학적 재능이 없이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학문영역은 철저하게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연구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통계숫자로 보여줘야 합니다. 이때부터 노벨 경제학상을 받으려면 인간의 행동을 수학적 모델로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게리 베커(Gary A. Becker, 1930~) 교수는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사람을 자본으로 본 것입니다. 경영자나 행정당국이 사람에 대한 교육투자와 같은 의사결정을 내릴 때 문화적 측면뿐만 아니라 투자수익률까지 아우르는 합리적 모형을 제시했습니다.

말하자면, 합리적으로 비용과 혜택을 계산해서 결정할 수 있는 수학모델을 만든 것입니다. 이 모델을 가족관계, 노동시장, 결혼시장, 이혼시장 등으로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하여 논쟁에 참여했고 시끄러웠습니다. 하지만, 베커 교수가 199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음으로써 논쟁은 끝났습니다. 합리화, 계량화, 과학화, 숫자화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합리화는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자본시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피셔 블랙(Fischer Black, 1938~1995), 마이런 숄즈(Myron Scholes, 1941~),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 1944~). 이 위대한 세 인물이 바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우선, 머튼은 투자자들이 자산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배분하는지를 연구해서 소위 자본자산가격결정모형(Capital Asset Pricing Model, CAPM)이라는 수학모델을 만들었습니다. 피셔 블랙과 마이런 숄즈는 그 유명한 옵션가격결정모형(Options Pricing Model, OPM)을 만들었습니다. 파생상품의 가격결정메커니즘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파생상품을 포함한 주식시장의 모든 가격결정메커니즘을 수학모델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델은 이미 70년대에 만들어져서 실무에서도 활용되었고, 실증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론들이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기본적인 프레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70년대 CAPMOPM을 포함한 투자이론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전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자본시장에서 인간의 행동이 수학모델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이론들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다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재무관리를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은 없었지만 투자이론의 정교함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젊은 지도교수는 투자론 교과서를 써서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일제시대 때 배운 지식으로 가르치던 교수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요즘과 같은 금융공학(financial engineering)이라는 참신한 용어도 없었지만, 투자론은 세상이 수학모델로 설명될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강의를 듣는 많은 학생들이 흥분했고, 너도나도 투자론에 빠져들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랬습니다.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지도교수는 출판사로부터 엄청난 인세도 받았습니다. 그는 인세를 다시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투자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론과 실제를 조화시켜보려 했습니다. … 그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투자이론을 포기하고 중도에 대학원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은행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단지 나의 개인적 역사일 뿐이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투자이론에 여전히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론들은 지금 금융공학이라는 용어로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어 가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그러니까 1997년 자본시장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수학모델의 기초를 세운 이 위대한 성과에 대해 스웨덴의 노벨위원회가 노벨 경제학상으로 보답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피셔 블랙은 노벨상이 수여되기 2년 전에 암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머튼과 숄즈에게만 상이 수여되었습니다.

이제 금융공학은 주식시장을 거의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대박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Long-Term Capital Management(LTCM)라는 헤지펀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펀드는 투자은행 살로몬 브라더스의 전설적인 채권 트레이더 메리웨더(John Meriwether, 1947~)1993년 세운 회사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에 빛나는 숄즈와 머튼, 월 스트리트 최고의 트레이더들, 그리고 하버드와 MIT 교수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을 끌어들여 펀드를 운영했습니다. 펀드는 연 40%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자랑했습니다. 냉철한 머리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압하면서 월 스트리트에서 질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레버리지를 이용해서 높은 수익을 올렸습니다. 1998년도에는 자기자본(47억 달러) 2,500%나 되는 자금을 끌어들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빚으로 투자거래를 계속했습니다. 이 돈을 주로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바람에 그 해 부외자산은 무려 12,500억 달러나 됐습니다.

빚은 잘 나갈 때는 대박이지만문제가 생기면 독약으로 돌변합니다이들은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와 그 이듬해 러시아의 금융위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해 엄청난 손실을 입고 파산했습니다게다가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LTCM은 불법적인 조세회피 거래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나서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LTCM의 성장과 파산과정은 이미 책으로도 출간되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현실이었습니다. 천재들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과정이었으니까요. 두 권의 흥미진진한 책을 소개합니다. 『라이어스 포커』와 『천재들의 실패』입니다.


파산 후에도 두 명의 노벨 수상자는 우여곡절 끝에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로버트 머튼은 2007년 금융자문회사인 Trinsum Group에 합류했습니다. 이 회사는 이번 금융위기에 다시 큰 손실을 입고 2009 1월에 파산보호신청을 냈습니다. 마이런 숄즈도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대만계 중국인이 세운 Platinum Grove Asset Management라는 헤지펀드를 맡았는데, 이번 금융위기로 또다시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현재는 펀드가 환매중단 상태에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이 만든 합리적 계량적 과학적 모델이 세상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지성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이 세계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연구가 진전되면 인간이 만든 합리적 모델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세계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합리화 계량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합리화되지 않는 세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체스터 바나드가 제시한 조직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계량화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려서 조직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야 조직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선각자 체스터 바나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개인과 조직에 도움이 되는 감각)은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가치이다. 그것이 널리 보급되기 위해서는 지성(intelligence)과 영감(inspiration)이 필요하다. 지성(intelligence)은 여러 사람들이 복잡한 세계에서 그들의 기술적인 역량이 서로 얽혀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 그것은 정규교육보다는 오히려 협동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감(inspiration)은 조직에 통일감을 주고 공동의 이상(ideals)을 창조하기 위해 필요하다. 구성원들이 이 이상을 지적으로 수용하기보다도 오히려 마음으로부터 수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날 여러 사건을 제대로 관찰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동의 이상(ideals)에 대한 신념이 구성원들의 협동을 이끌어내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다.”

1930년대에 이미 조직을 오늘날과 같은 경쟁체계가 아닌 협동체계로 파악했던 체스터 바나드의 혜안이 놀랍지 않은가!

재미 없겠지만, 바나드 얘기는 계속됩니다. 아주 중요하니까요!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1930년대 초반, 소위 테일러리즘(Taylorism)에 저항하기 위해 연구했던 메이요(Elton Mayo)의 연구작품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테일러리즘은 오히려 포드자동차에서 꽃피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공장을 이동식 조립라인으로 만들어서 과학적 관리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엄청난 생산성 향상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포드는 1914 15, 수익금 중 1,000만 달러를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는 데 쓰겠다는 파격적인 발표를 했습니다. 당시 주급11달러에 불과하던 노동자의 임금을 하루 5달러, 주급 30달러로 올렸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 전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했습니다.

 대부분 아낌없이 주는 관대한 행위라고 칭찬했는데, 유독 <월 스트리트 저널>산업계에서 시도된 가장 어리석은 행위라고 혹평했습니다. 포드사의 생산성 향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나중에 밝혀졌는데, 이동식 조립라인을 통해 절감된 경비는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20달러, 주당 120달러를 지불할 수 있을 금액이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 중에서 약 1,120만 달러가 주주들에게 지급된 셈이었습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자, 포드는 매우 큰 폭의 임금을 다시 삭감해 버렸습니다. 포드는 결코 박애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테일러의 생산성 복음이 휩쓸고 있던 시절, 그러니까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경영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체스터 바나드(Chester Irving Barnard, 1886~1961)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별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바나드는 젊은 시절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에 필요한 졸업학점을 다 이수했습니다. 그러나, 기술계량과목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학당국으로부터 학사학위 수여를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조직에서 경영자의 기능을 밝힌 공로와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7개나 되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조직과 경영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전문적인 학자로 연구한 적이 없습니다. 사기업에 입사해서 사장까지 지냈고, 공기업과 비영리단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통찰력은 1938년에 『경영자의 기능』(The Functions of Executive)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몇 차례 소개했습니다. 참고하세요.

2009/02/18 경영이란 무엇인가(3)_효과성과 효율성
2008/12/29 경영의 효율성과 효과성
2008/10/30
내가
읽은 가장 위대한 경영학 고전

이제 바나드의 통찰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의 사상이 나중에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나드는 조직이 성립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공동의 목적 (common purpose)
둘째, 협력 의지(willingness to contribution)
셋째,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이 세 가지 요소는 조직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 모든 조직에서 볼 수 있습니다.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통찰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영자의 기능이란 이 세 가지 요소를 잘 이해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경영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선 첫째 요소부터 보겠습니다. 경영자는 조직의 공동목적을 구성원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직의 목적과 개인의 동기를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에, 조직의 공동목적이 성취됨으로써 구성원의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효과성과 효율성의 개념적 분리가 나타납니다
.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효과성은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하고, 효율성은 그 과정에서 구성원의 동기가 충족되거나 만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효과성이 높아도 효율성은 낮을 수 있고, 효과성이 낮아도 효율성은 높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나드는 효율성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판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들어, 충성심과 신뢰, 팀 스피릿, 조직목적에 대한 헌신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 즉 구성원의 태도변화와 같은 요소들은 공학적으로 다루기 힘들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바나드가 효율성이란 구성원의 동기충족이나 만족을 나타낸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연구자들은 한결같이 효율성을 공학적 의미, 즉 투입량대비 산출량의 비율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숫자는 인간에게 포르노만큼이나 매혹적입니다. 숫자를 들이대면 꼼짝할 수 없습니다. 어느 경영자가 매출이 전년대비 20% 하락했다는 보고를 듣는다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수도권의 매출증가율이 5%로 높아졌다는 보고는 어떤가? 고객만족도가 경쟁사에 비해 2%포인트 낮다는 보고를 받았다면? …

인간이 숫자에 치명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허버트 사이몬(Herbert A. Simon, 1916~2001)은 효율이라는 용어를 숫자로 대치시켜 버렸습니다. 엘톤 메이요의 엉성한 인간관계 개념과 체스터 바나드의 "경영자의 기능"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측정할 수 없는 것보다는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이몬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1945년에 『관리행동론』(Administrative Behavior)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합니다. 이 책이 그의 사상에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통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효율성(efficiency)이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대안 중에서 최대의 이익을 조직에게 가져다 주는 대안을 선택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리고는 주관적 가치가 제거된, 소위 매정한 효율성’(ruthless efficiency)을 계산하여 관리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제적이고도 합리적인 효율성 개념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함으로써 나중에는 노벨 경제학상까지 받았습니다.

그 후의 경영학 또는 경제학에서는 소위 효율성 공학(efficiency engineering)이 각광을 받기 시작합니다. 효율성 공학에는 모든 것이 측정 가능해야 하며, 계산할 수 있는 숫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만약 측정할 수 없는 대상이 있다면 측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형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구성원의 만족감 같은 것은 조직 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지만,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측정할 수 있는 잣대가 마땅치 않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전제와 조건을 만들어서 측정 가능하도록 조작해야 합니다. 7점 스케일로 측정한다면, 가장 만족스러웠을 때를 7점에 놓고 가장 불만족스러웠을 때를 1점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만족감은 몇 점인지를 조사하여 만족수준을 계량화합니다. 5.5보다는 6.3이 더 높은 점수이므로 만족감이 더 높다고 판단합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 통계학의 도움으로 매우 정교한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결과의 타당성과 신뢰성을 거의 의심하지 않습니다.

많은 기업이 직원 사기나 고객만족을 설문조사기법으로 파악합니다. 여기서 얻은 숫자를 통계 처리하여 경영에 반영합니다. 정부에서도 관련부처들의 경영혁신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각종 만족도를 조사합니다. 지자체에서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을만 되면 온 나라가 만족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실무에 있을 때, 이 분야에 관여해봐서 조금 압니다만, 한 마디로 말하면 신뢰할 수 없다입니다. 왜냐? 고객만족과 같은 질적인 요소들은 워낙 주관적 요소가 많기 때문에 설문지와 모집단 구성, 그리고 샘플의 추출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합니다. 6.3 5.5의 차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숫자가 조작되어 통계 수치로 나왔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숫자들이 완전히 엉터리로 지어낸 가짜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숫자가 나오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전제와 가정이 깔려 있기 때문에 그 전제와 가정 중에서 한두 가지만 바뀌어도 숫자는 달라지고, 아무도 그 바뀐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측정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질적인 판단영역을 계량화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치르는 비용과 폐해는 그것을 통해 얻는 이득에 비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무슨 협회나 단체에서 기업들에게 만족도를 조사해 주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만족도가 높은 상태에 있으면 명예의 전당에 올려주는 장사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실 이것이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영자들이 조작적으로 수집된 통계수치에 의지해서 경영하는 것은 마치 내비게이션을 믿고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 내비게이션을 믿으면 가끔 낭패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주체적 삶을 숫자나 기계장치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니까, 지리에 대한 방향감각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경영자는 현장의 상황이나 구성원들의 태도변화를 직접 감지할 수 있는 민감한 감각을 기르고 영혼의 순수함을 유지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나드는 개인적 동기의 주관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설득에 의한 구성원들의 태도변화를 중시했습니다. 그는 이런 주관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대안이 더 효과적이라거나 더 효율적이라는 객관적 질문을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바나드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만족도를 조사하는 행태를 보면 뭐라고 할까요? 내 짐작에는 당장 집어치우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테일러리즘의 광기를 뚫고 피어 오른 어린 새싹이, 즉 1938년에 발표된 "경영자의 기능"이라는 바나드의 기념비적인 사상이, 포르노보다 더 강렬한 숫자 앞에서 총맞은 것처럼 스러져갔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영자와 학자들이 숫자 앞에 무릎을 꿇고 숫자의 신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숫자 앞에서 눈을 돌려 과감히 무릎을 펴고 일어서야 합니다. 숫자는 항상 진실을 가리기 때문입니다이제 숫자가 아닌 사태의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나드 얘기는 계속됩니다.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테일러가 뿌린 과학적 측정에 의한 관리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과급과 함께 최적의 작업환경을 마련해 준다면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최적의 작업환경이란 인간의 근육과 기계장치가 서로 조화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될 수 없다는 격언이 미국의 산업계에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이것이 너무 과도해져서 1912년 의회에서는 노동자의 작업활동을 스톱워치로 재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켰습니다. 1949년에 가서야 이 금지조항이 풀렸습니다.

 

이런 과학적 측정의 열풍은 테일러 이후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식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와 심리에 대해 측정하고 싶은 유혹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품질관리운동을 거쳐 벤치마킹, 균형성과지표, 식스시그마 운동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전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공장노동에 적용되던 이념이 오늘날에는 지식근로자에게까지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경영학자들이 테일러의 생산성 복음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테일러리즘을 넘어서고 싶었던 사람은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였던 엘톤 메이요(George Elton Mayo, 1880~1949)였습니다. 7년 반이나 넘는 장기간의 실험 끝에 인간은 타인에 의한 감정적 관심에 따라 생산성이 변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연구결과는 193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런 결론을 얻게 한 것이 저 유명한 호손 연구(Hawthorne Experiment)입니다. 전화설비 생산공장이었는데, 조명의 밝기와 생산성, 휴식시간과 생산성, 작업일수와 생산성은 물론이고, 성과급, 수면시간, 심지어 공장 내 습도까지도 실험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어떤 변수를 어떤 방식으로 조작해도 생산성이 올라갔습니다. 공장 노동자에게 실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관리자와 연구진에게 그만큼 주목을 받는 것이고, 그것이 상사와 동료들 간에 인간관계를 좋게 만듦으로써 생산성이 올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나도 상사나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을 때 일이 재미있었고 열심히 일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내가 한국은행에서 조직개혁작업을 할 때는 엄청난 업무량으로 육체적으로는 벅찼지만, 상사와 동료, 그리고 부하직원들과의 원만한 관계로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엘톤 메이요 교수의 연구결과가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호손실험은 테일러리즘에 대한 반격이었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 감정은 작업장의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실험결과가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감정에 의해 좌우되며, 이것이 곧 생산성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이요는, 인간은 결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경제적 동물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사회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온 세상이 테일러의 복음을 따라 다녔지만, 메이요는 그게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긴 하지만, 이 거대한 실험프로젝트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습니다. 실험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생산성이 좋아진 게 아니라 돈 벌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 이면에 깔려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팀의 인사를 담당했던 관리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증가된 주된 이유는 추가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실험에 참여했던 동료 연구자들도, 메이요가 연구결과를 다르게 해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교수진이 추진했던 방대한 연구는 실패작이었습니다. 메이요는 자신만의 관점과 신념을 연구결과에 꿰어 맞추었고 결과들을 교묘히 조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동안 기업을 연구해 왔던 사람들이 제기한 상반되는 견해를 무시했습니다. 말하자면, 노동자들이 단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생산성이 좋아졌다는 엉터리 결과를 얻기 위해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그럴듯하고, 단순하고 인간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습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진실처럼 느껴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연구의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기업 내에 비공식조직인 각종 동아리 모임과 호프데이와 같은 행사를 장려하는 것은 메이요의 덕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업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공식적인 행사들이 과연 직원들의 생산성을 높여주는지는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단 한번도 그런 행사를 통해 일에 대한 동기가 고양된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직원들간의 화합을 위해 연수원에서 각자의 성격특성(MBTI, DiSC와 같은 검사지로 성격유형을 분석한 결과)을 비교하고 장단점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도록 유도하는 방식과 리더십 스타일과 유형을 분석(수많은 분석틀들이 시중에 유포되어 있음)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방식의 훈련코스를 여러번 참가해봤습니다. 연수를 받을 때는 재미있었지만, 이런 훈련을 통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만, 짐작컨대, 다른 사람들도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사에서 베푸는 행사라는 게 대부분 회사가 직원들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는 알리바이, 즉 생쇼(show-off)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신뢰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성격적 특성이나 행동패턴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사(퍼포먼스)가 다 엘톤 메이요의 아이디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껍데기를 보면 그럴듯 한데, 그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아무튼, 인간이 일하는 근본적 동기는 무엇인가? 테일러가 주창한 것처럼 돈을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노동윤리인가? 메이요의 신념처럼 인간관계에 의해 인정받으려는 욕구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1930년대 미국경영학은 이 의문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을 합리화하려는 두 가지 시도가 모두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테일러리즘의 열풍은 가시지 않았고, 회사는 여전히 직원들의 노동현장을 몰래 숨어서 스톱워치로 재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인적자원을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과학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경영학의 태조라고 할 수 있는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입니다. 아버지는 퀘이커 교도인 법률가였고, 어머니는 청교도 이민자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테일러에게는 엄격한 개신교 노동윤리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담배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고, 커피와 차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괜히 흥분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는 청교도적인 삶의 전형이었습니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하버드 법대에 들어갔으나 시력이 나빠져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물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공장노동자들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노동자들은 주로 성과급을 받았는데, 더 많은 일을 하면 더 벌 수 있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일하면 공장주가 성과급을 더 지급하는 게 아니라 성과급의 시간당 급료를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들에게는 이익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농땡이(soldiering)를 부렸습니다.

 

테일러의 노동윤리로서는 이런 모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꾀부리는 노동문화는 테일러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철주야 노력해서 개인의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1주일에 6일간은 꼬박 일하고 일요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습니다. 그의 하루 일정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공장에서 일하고 밤 11시까지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개인당 최고의 생산량과 표준적인 생산량을 계산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기계의 능력을 측정하는 데 이용됐던 기본원리들을 탐구했습니다. 그가 고안한 방법은 단위 노동시간당 생산량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위시간당 작업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작업을 구성요소로 세분화했습니다. 세분화된 요소별 작업을 결합하면 전체 작업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가 자신의 자동차생산에 응용하여 대박을 터트리게 됩니다.)

 

테일러는 노동자의 능력이 단위시간당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모든 작업과정을 규격화된 노동형태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렇게 표준화된 노동량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을 과학적 관리(Scientific Management)라고 생각했습니다. 테일러에게 있어 과학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동행위를 계량화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10분간 정상속도로 작업한 경우와 전속력으로 작업한 경우를 구분해서 일인당 하루에 최대한의 생산량을 계산합니다. 하루 10시간 노동할 경우 최대생산량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휴식시간을 하루 일과의 40%로 계산하여 표준적인 생산량을 정했습니다. 이것은 어림짐작이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이런 방식을 공장에 적용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산량이 전보다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성과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실제로 받은 성과급은 전에 받았던 것보다 적었습니다. 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노동으로 생산량이 늘어났는데도 말입니다. 표준적인 생산량을 초과한 것에 비례하여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초 시계로 노동시간을 재는 테일러가 원흉이라고 점차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습니다. 노동에 있어서 태만과 게으름을 몰아내고 생산성을 최소한 30%이상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은 가차없이 해고하도록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조합을 중심으로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테일러의 방식은 물질적인 기계장치가 아니라 노동자의 정신과 근육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계장치를 때려부수는 식의 저항도 불가능했습니다. 저항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테일러의 연구성과는 소리소문 없이 퍼졌습니다. 대부분의 공장에서는 테일러의 과학적 방법에 따라 노동관행이 바뀌고 있었고, 생산성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테일러의 연구성과는 1911년 『과학적 관리의 원칙』(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 경영학의 역사와 발전에 주춧돌이 되었고, 테일러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경영학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곳곳에서 초 시계를 가지고 노동자들의 작업을 통제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과학적 관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까스로 파업은 진정되었지만, 1912년 미국의회가 나서서 조사를 벌였습니다. 테일러는 의회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과학적 관리는 결코 효율적인 대안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용을 계산하는 시스템만도 아닙니다. 이는 초 시계로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을 평가하는 장치도 아닙니다. 이것은 노동시간이나 동작에 대한 연구도 아닙니다. … 이것은 완벽한 정신혁명일 뿐입니다.”

 

이것이 테일러의 노동윤리이자 신념이었을 것입니다. 경영분야의 작가로 이름을 떨친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는 과학적 관리방식은 위대한 통찰력이었고, 서구 사상에 미친 영향들 중 가장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공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과학적 관리에 대한 강박관념은 그의 말년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잔디가 자라는 것을 관찰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완벽한 잔디를 만들기 위해 800번 이상 실험을 했습니다. 1cm2에 심겨진 잔디 잎을 늘 계산했습니다. 생애 마지막 한두 해 동안 테일러는 잔디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잔디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잔디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디가 자라는 공정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지칠줄 모르는 테일러의 강박관념은 인간이 아니라 노동행위의 합리화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경영학자들은 대부분 테일러의 후예로서 테일러리즘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끔 멍청하게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테일러가 만약 대학을 마치고 법률가가 되었다면 미국경영학은 어떤 식으로 발전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지난 이야기

             조직이란 무엇인가(1)_조직의 일반적 정의
             조직이란 무엇인가(2)_제1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3)_제2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4)_조직의 목적은 고객창조인가
             조직이란 무엇인가(5)_제3세대 경영학(Wholism)
             조직이란 무엇인가(6)_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
             조직이란 무엇인가(7)_제3세대 조직설계와 마음


3세대 경영학에서는 조직을 인간의 마음에 기초하여 설계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모든 것이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1,2세대 경영학은 이윤최대화를 위한 당근과 채찍의 원리로 조직을 설계해 왔습니다


이런 방식은 조직구성원의 잠재력을 고갈시킬 뿐입니다.

 

『맹자』 공손추(公孫丑) ()편에 다음과 같은 예화가 나옵니다.

 

송나라 사람 중에 벼 싹이 자라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뽑아놓은 자가 있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고 돌아와서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나는 매우 피곤하다. 내가 벼 싹이 자라도록 도왔다고 하자, 그 아들이 달려가서 보았더니 벼 싹은 말라 있었다. 천하에 벼 싹이 자라도록 억지로 조장하지 않는 자가 적으니…”

 

이 예화가 무슨 얘기냐 하면, 어리석은 농부가 보기에는 벼가 더디 자라니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 싹을 조금씩 뽑아 놓은 것이지요


빨리 자라도록 조장(助長)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벼는 빨리 죽지요


조장(助長)은 한자의 뜻으로만 보면 도와서 자라게 한다는 의미니까 좋은 말이지요


하지만 대상의 잠재력과 역량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조장하는 것은 


오히려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조장한다는 말은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경영에서 당근과 채찍으로 성과를 내도록 몰아붙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1,2세대 경영학은 사실 이런 조장(助長)의 기술을 가지고 경영하도록 


경영자들을 조장해 왔습니다


나는 경영학이 이런 조장의 기술을 포기하고 영혼의 능력을 보살피는


보다 차원 높은 방식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조직설계의 기본전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은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영혼의 능력을 일깨우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한다.

  인간의 잠재력은 서로 다르다.

④  인간의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를 원한다.   


 

마음, 오감 그리고 실재

 

조직설계는 한마디로 구성원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란 무엇인가로 질문해 들어가면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신라시대의 원효대사에 의해 주창된 사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일체의 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서 이 세상만사가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이 우주 만물을 가능케 하는 배후에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존재론의 입장으로 볼 수도 있고


사물이나 현상은 관찰하는 사람의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는 인식론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불교적 입장이 어떻든, 그리고 우리가 일체유심조를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일체유심조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땅거미가 어스름한 저녁 녘에 집으로 돌아가다가 


뭔가 물컹한 것을 밟았어요


순간 뱀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며칠 전에는 이웃 마을에서 어떤 청년이 밤길에 뱀에 물려 다리가 퉁퉁 붓고 


고통스러워서 병원에까지 실려갔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내 심장은 탱크엔진처럼 크게 요동쳤고 온 몸이 순식간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근육은 놀라 도망쳐야 했습니다. 집에 다 와서까지도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호흡은 여전히 헉헉거렸고 심장은 벌렁거렸습니다


그날 밤 뱀에 관한 꿈을 꾸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밝은 눈으로 현장을 가보니


뱀이 아니라 썩은 새끼줄을 밟았던 겁니다


마음이 실재(reality)를 만들어 낸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는 마음 속에 그려진 허상입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은 불안과 초조 속에서 공부를 합니다


시험이 불안하게 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대하는 마음이 불안과 초조를 만들어 냅니다


말하자면, 실재(reality)를 스스로 창조해내서 불안하고 초조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폴란드계 미국 수학자였던 알프레드 코르집스키(Alfred Korzybski, 1879~1950)


 『Science and Sanity』에서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그린 심상(心象)은 실제의 영토가 아니라


자신이 실재(實在, reality)라고 만들어낸 지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첫 문장을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고 쓴 것과 같습니다


서양사람들의 이런 생각은 신라시대의 일체유심조 사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마음의 프로그램

 

우리는 세계의 외부현상을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서 뇌 안에 홀로그램(hologram)과 


같은 지도를 만들어 냅니다


, 뇌에 내적 표상(internal representation)를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표상(表象)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과거의 경험을 뇌에 축적할 때


그 상황에 부합하는 오감(五感 :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의 정보와 에너지를 


하나의 표상(表象)으로 뇌세포에 저장해 두었다가 기억해 낼 때 


저장했던 반대방향으로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오감이 중요합니다


나는 이것을 V.A.K.O.G.라고 표시하기도 하는데


Visual, Auditory, Kinesthetic, Olfactory, Gustatory의 첫 글자를 조합한 것입니다


경험을 기억으로 저장할 때


뇌세포의 전기적 화학적 작용은 오감(V.A.K.O.G.)이 받아들인 정보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썩은 새끼줄을 뱀으로 저장할 때


뱀의 팔뚝만한 몸집에다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모습(시각), 


쉬익~하고 지나가는 소리(청각), 밟았을 때 물컹~하는 느낌(촉각), 


이웃 마을 청년이 뱀에 물려 고통 받는 모습(시각) 등이 뇌에 강렬하게 기억됩니다


나는 이러한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와 에너지를 저장해 두었다가 


밤에 꿈을 꿀 정도로 벌벌 떨었었죠


그런 정보는 철저하게 나 스스로 만들어낸 실재(reality)였습니다


확고부동한 실재였습니다


이튿날 그것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혼자서 전혀 엉뚱한 지도(map)를 그려내고


그 지도에 의해 두려워했던 겁니다. 어렸을 때의 이 경험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처럼 기억해낼 때는 오감으로 뇌세포들이 그 상황을 재현(represent)해 냅니다.

 


두뇌에 새겨진 이 지도는 마치 프로그램과 같습니다


마음의 프로그램(mind program)이지요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이란 명령어들의 조합(set of instructions)을 말합니다


명령어 체계가 바뀌면 프로그램이 바뀌기 때문에 전혀 다른 지도를 그릴 수도 있겠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세상을 보는 프레임(frame)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지금 어떤 프로그램을 쓰고 있는지


즉 어떤 지도를 가지고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지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마음의 어떤 명령어들이, 그리고 어떤 지도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를 잘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그렇게 고통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경험에 의하면, 수많은 학생과 직장인들이 불안과 초조


건강을 해칠 정도의 심리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요


자신도 잘 모르는 무의식적인 마음(unconscious mind)의 작용에 의해 행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의 뇌에 그런 프로그램이 굳어져서(hardwired)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까지는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이라고 무시하고 지냅니다


그러다가 병적 증세가 깊어지면, 약물과 수술치료에 의지합니다


원인은 전혀 다른 데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따라서 조직을 설계할 때는 인간의 마음, 특히 인간의 무의식적인 마음을 반영해야 합니다


무의식적인 마음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끝)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지난 이야기

             조직이란 무엇인가(1)_조직의 일반적 정의
             조직이란 무엇인가(2)_제1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3)_제2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4)_조직의 목적은 고객창조인가
             조직이란 무엇인가(5)_제3세대 경영학(Wholism)
             조직이란 무엇인가(6)_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


어떻게 하면, 3세대의 조직설계가 가능할까요?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 강좌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영을 위해서는 제3세대의 조직설계에 관한 기초적인 개념체계를 논의하고, 실무적으로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앞서 영혼의 능력이란 바로 자신에게 내재된 정보와 에너지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가장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납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의식(잠재의식)으로 덮여 있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능력을 관리 가능한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 역량개념입니다. 역량개념은 경영관리, 특히 인사부문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여서 나중에 별도의 강의를 계획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간단히 주의할 점만 언급하려고 합니다.

 

역량(competence)개념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잠재력을 부분적으로 쪼개서 분석해보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개인의 직무적합성을 판단할 수 있도록 고안된 개념입니다. 이러한 연구의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20세기 초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장교선발에서부터 나치 친위대를 뽑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선발의 신뢰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활용되었습니다.(Christof Oberman, Assessment Center – Entwicklung, Durchführung, Trends, Gabler 2002, 23~24쪽 참조.)

 

그러나, 이 개념이 실무에 일반적으로 소개된 시기는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특히 역량(competence)이라는 용어 자체는 심리학자 데이빗 맥클레란드(David McClelland, 1917~1998) 교수에 의해 70년대에 생성되었습니다.(David McClelland, Testing for Competence rather than for “Intelligence”, American Psychologist(1973), 28, 1~44쪽 참조.) 아직 학계와 실무계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이론은 없고 다양한 개념들만 산만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산업계에서 역량개념을 이용한 선발을 통해 효과가 검증된 경우들이 보고되고 있을 뿐입니다.(라일 스펜서(Lyle M. Spencer) , 『핵심역량모델의 개발과 활용(Competence at Work), PSI컨설팅 1998 참조.)

 

일부 컨설팅회사나 컨설턴트들이 역량개념이 비즈니스가 되니까 너도나도 역량모형이니 역량평가니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데, 사실 기존의 개념들에다 역량이라는 이름만 붙여서 컨설팅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인사실무자들은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줄 알고 기대했다가 곧바로 실망합니다. 최근에는 역량모델과 역량평가를 각종 계량모델로 돌려서 만들어내는 방식을 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역량개념도 한때의 유행으로 끝날 공산이 큽니다.

 

역량개념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이나 분석심리학에서 인지심리학에 이르는 심리학과 뇌과학의 깊은 뿌리를 잘 이해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역량은 건조하고 차가운 분석개념이 아니라 직무적합성 측면에서 한 인간의 영혼의 능력과 잠재력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역량모델, 역량진단, 역량개발 등으로 시스템화 한 것이 바로 역량관리시스템(Competency Management System)입니다. 이것 역시 조직구성원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수단입니다.

 

조직의 경영이 역량관리시스템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성과관리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조직의 안정적이고도 지속적인 성장은 성과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성과책임을 규명하고, 그 성과를 진단하여 피드백(feedback)과 동시에 피드퍼워드(feedforward)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상도 적절히 해야 합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규정화 해 놓은 것이 바로 성과관리시스템(Performance Management System)입니다.

 

성과관리시스템과 역량관리시스템의 설계는 뒤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조직은 조직구성원이 각자 영혼의 능력을 잘 발휘하여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하고, 그 결과물인 성과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만 강조하고자 합니다.(끝)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지난 이야기

             조직이란 무엇인가(1)_조직의 일반적 정의
             조직이란 무엇인가(2)_제1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3)_제2세대 경영학
             조직이란 무엇인가(4)_조직의 목적은 고객창조인가
             조직이란 무엇인가(5)_제3세대 경영학(Wholism)


인류가 발전시켜온 지적 합리성 너머에 비합리적 질서가 있다는 사실은 제3세대 경영학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조직이론에 연결시키면, 조직구성원들간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연결되어 있음의 원리(principle of connectedness)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으로 해서 평안과 행복을 느낍니다. 연결이 끊어지면 긴장과 불안이 엄습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연결이 끊어져 있다고 느낄 때, 부하들이 상사나 동료들과 연결이 끊어져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평소의 행동패턴을 바꿉니다.

 

오래 전부터 조기유학 붐이 일고 있는데, 조기유학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서 걱정입니다. 조기유학은 아니지만, 나도 유학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유학에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유학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외국어 문제도, 돈 문제도 아닙니다. 외로움입니다.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인간에게는 불안이 엄습합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못된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자녀교육에 실패하는 부모의 대부분은 아이들을 자신의 욕구에 부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아이들과의 연결상태를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직을 설계할 때는 어떻게 하면 조직구성원들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도록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이란 조직구성원들을 항시 일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휴대전화나 블랙베리(Blackberry)와 같은 물리적 연결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간의 마음과 마음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정신과 정신, 영혼과 영혼의 연결입니다.

 

조직의 정의

 

이런 입장에서 조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조직은 조직구성원들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들에게 내재된 정보와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내어 발휘하도록 돕는 삶의 수단이다.

 

이제 제3세대의 경영학으로서의 조직이론을 새롭게 구축해야 할 이유는 명백해졌습니다. 아직 조직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생소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1, 2세대의 경영학에서 보면 공동의 목표도 없고, 협동도 없는 조직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직운영의 현실을 보면, 오히려 이러한 정의가 더 현실감이 있습니다.

 

첫째, 구성원들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음의 느낌(feeling of connectedness)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관심을 갖게 되는 첫 출발이자 신뢰로 나가게 하는 바탕이 됩니다.

 

둘째, 구성원들에게 내재된 정보와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내도록 서로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정보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이 그 정보와 에너지를 조화시켜서 조직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셋째, 조직이 구성원의 삶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조직은 목적이 될 수 없고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삶의 풍요로운 수단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조직이 아니라 또 다른 지배이데올로기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의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직접적으로는 조직을 통해 인간의 잠재력이 창발적으로 구현된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간접적으로는 조직의 목적은 결코 이윤추구에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대차대조표에 나타나는 이윤은 인간의 잠재력이 발현된 결과이지 이윤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경영한 결과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2세대 경영학과 완연히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기업의 존재목적이 이윤추구에 있다는 가정은 매우 편협한 가르침이며, 인간의 삶을 오도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최근에는 이윤보다는 조직의 이해관계인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이윤추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점을 흐리는 효과밖에는 없습니다.(끝)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