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아이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템즈강을 건넜더니 수 마일을 걸은 발걸음은 더 떨어지지 않았고, 배는 출출해졌습니다. 중국집이 눈에 들어왔고 의자에 앉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시원하게 맥주도 한 잔 마시고 짜장면 비슷한 것을 시켜 먹었습니다.
힘을 내 음식점을 나와서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간을 걸었더니 그리니치 공원이 나왔습니다.
선진국은 도회지에 있는 공원의 넓이와 질적 수준에 의해 결정되는가 봅니다. 런던은 조금만 걸어도 드넓은 공원이 나타납니다. 그것도 방치된 것이 아니라 잘 조성된 공원, 그래서 아무런 통제 없이도 아이들이 맘대로 뛰어 놀 수 있는 공원, 이런 공원을 서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 아직 선진국이 되려면 멀었나 봅니다.
공원을 빼놓고서 런던을 논하지 말라고 충고한 책을 보았습니다. 전원경의 『런던 – 숨어 있는 보석을 찾아서』라는 책에서는 런던에서 좋은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이층버스, 공원, 극장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내가 런던에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공원이었습니다. 이층버스와 극장은 돈 들이면 되는 것이지만, 공원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공원은 역사이자 정신이자 문화입니다.
런던은 세계의 도시 중에서 가장 넓은 녹지 면적을 공원의 형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런던의 3분의 1이 녹지인 공원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 유명한 하이드 파크, 리젠트 파크, 켄싱턴 가든, 세인트 제임스 파크 등 크고 작은 공원이 80여 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공원의 풍경이 대개 비슷합니다. 한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엄청 넓고, 시원한 잔디밭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공원을 산책할 수 있는 길과 벤치, 그리고 동상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크고 작은 연못에서는 대개 백조와 오리들이 노닐고 있습니다. 그곳은 한마디로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안식처입니다. 디즈니랜드식의 놀이동산이 아닙니다. 음식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거의 쾌적함을 넘어서는 도시의 쾌적함입니다. 서울은, 아니 우리나라의 대도시들은 지금 콘크리트 숲으로 덮이고 있습니다.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이 땅이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하는 이 시대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야 제모습을 찾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런던너(Londoner)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원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것입니다. 목전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옹졸한 이 시대정신을 사회전체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유보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정신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은 대운하가 아닌 공원의 형식으로 드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다시 공원을 부러워하면서 천문대를 향해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느닷없이 딸은 나에게 약속 하나 하자고 했습니다. 내가 딸아이와 못할 약속이 어디 있으랴!
“아빠, 절대 뒤를 돌아다 보면 안 돼! 알았지!”
“오냐, 그렇게 하마.”
중턱쯤 올라갔을 때, 나는 뒤를 돌아다 보고 싶어졌습니다.
“뒤를 보면 안 될까?”
“안 돼, 지금은 안 돼!”
딸은 한사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지금 뒤돌아보면 소금기둥이 된다나 어짼다나… 아무튼 나는 수 마일을 걸은 무거운 다리를 옮기며 왕립천문대를 향해 올라갔습니다. 딸이 부리는 마술을 기대하면서…
“아빠, 됐어. 뒤돌아 봐도 돼!”
왕립천문대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2008년 7월 31일 18시 28분이었습니다.
서울이 동경 127도라는 표지판도 발 밑에 보였습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인들이 만든 세계의 표준을 봤습니다. 우리가 힘써 만들어야 할 세계의 표준은 뭘까요?
대운하와 몰입교육으로 세계표준을 만들 수 있을까요? IT, NT, GT, ET 등과 같이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21세기를 만들어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청소년들이 시험점수가 아니라 사고력과 상상력을 기른다면 우리는 충분히 첨단분야의 세계표준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사진들은 17세기 크로스토퍼 렌이 설계했다는 왕립천문대의 겉모습입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아주 소박하기 짝이 없는 건물입니다.
우리는 이 여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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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강 2008/12/15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여행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어느 나라나 국민적 성숙수준에 걸맞는 문화를 향유하는 것 같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짧은이야기 2009/03/13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따님과 선생님 사이에 깊은 애정과 친근함이 보여서 참 부럽습니다.
'공원(녹지) 면적으로 그 나라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것', 런던에서 인상적인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공원도 특히 그랬죠. 어쩜 이렇게 넓은 면적을 공원으로 과감하게 투자했을까 생각하면서 그들이 부럽기도, 두렵기도 했어요. 무조건 높은 빌딩, 무조건 높은 아파트를 생각하는 천박한 사람들은 결코 그들의 수준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물론 요즘 서울도 녹지 면적을 늘려 간다고 하지만.. 글쎄요.. 글쎄요.. 황급히 아파트 세우기를 배운 사람들이 또 억지스럽게 급하게 공원 만들기를 배워 갈까 오히려 걱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몰아내고 판잣집을 허물고 공원을 만들어버린다면, 과연 거기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뛰어놀게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좋은 글, 진심으로 잘 읽었습니다. ^______^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서울의 도심 재개발은 마치 16세기 영국에서 있었던 인클로저(enclosure)운동과 같아요. 원주민을 내쫓고 부자들이 차지하는 방식으로 개발되고 있으니까요. 현대판 인클로저 운동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원주민들이 더 좋은 생활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재개발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