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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기독교 장로가 두 번이나 대통령을 했고, 이번이 세 번째인데 그 때마다 나라는 점점 갈등과 불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소외된 백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몫을 줄여서, 그 몫보다 더 많은 것을 부자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부자들이 내는 종합부동산세를 깎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나라의 재정이 힘들어졌습니다.
세금을 어디선가 더 걷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농어촌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었던 각종 세금감면을 폐지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농어촌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려는 것이지요. 여기서 통계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가 더 가고 덜 가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니까요.

 

부자들의 세금부담이 이토록 적은 나라에서 부자들에게 매기는 종부세마저 징벌적 조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영혼이 있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할 때의 자본과 재무제표상 자본계정의 자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재무제표상의 자본을 추구하는 이념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란 자본계정을 무한히 확대시켜 가는 이념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의 논리는 자본 그 자체가 끝없이 증식하도록 돕습니다. 자기증식을 끝없이 반복하는 세포를 의학적으로는 암세포라고 합니다. 오늘날 자본의 논리는 암세포처럼 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이 암세포에 의해 인간의 공동체 정신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칼 폴라니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이명박 정부에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가난한 사람들의 몫을 빼앗아 부자들에게 넘겨주는 것일까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기 때문도 아니고 마음씨가 나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에 빠져 있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개신교 장로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본의 제자인가요, 아니면 예수의 제자인가요? 예수를 팽개치고 자본을 따르기로 했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예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의향이 있다면 다음의 가르침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 주인은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오전 9시쯤 돼 그가 나가 보니 시장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도 포도원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12시와 오후 3시쯤에도 다시 나가 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다시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왜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서 빈둥거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내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고 말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일꾼들을 불러 품삯을 지불하여라.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 고용된 사람까지 그 순서대로 주어라.’ 오후 5시에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 각각 1데나리온씩 받았다. 맨 처음 고용된 일꾼들이 와서는 자기들이 더 많이 받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각 사람이 똑같이 1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들은 품삯을 받고 포도원 주인을 향해 불평했다.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고작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고되게 일한 우리와 똑 같은 일당을 주시다니요?’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일꾼 중 하나에게 대답했다. ‘여보게 친구, 나는 자네에게 불의한 것이 없네. 자네가 처음에 1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자네 일당이나 받아가게. 나중에 온 일꾼에게 자네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네. 내가 내 것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선한 것이 자네 눈에 거슬리는가?’

 

이처럼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 1~16)


 

예수의 이 위대한 가르침은,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포도원에 일하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통지를 받은 근로자들, 택배운송기사 등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예 노동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사람들도 바로 우리 이웃에 있습니다. 포도원에 불려오지도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들에도 똑 같은 몫을 주라는 가르침을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바로 이 비유를 가슴에 담고, 애정이 없는 경제학은 인류를 패망의 길로 인도한다고 일깨워주었습니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영혼의 능력이 뿜어내는 힘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우주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모조리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위대하면서도 신비로운 힘입니다. 이 힘은 포도원의 주인처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 존 러스킨, 김석희 옮김, 느린걸음 2007) 똑 같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변호사 모한다스 간디는 러스킨의 책을 읽고 마하트마 간디로 변했습니다. 위대한 영혼이 된 것이죠. 러스킨의 이 책을 읽고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을 한번 읽기 시작하자 놓을 수가 없었다. …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생활을 그 책의 이상에 따라 변경하기로 결심했다. … 내 생애에 즉각적이고도 실천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바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이다.”

 

그래서, 간디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개신교 장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간디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개신교 장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러스킨은 묻습니다.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도 똑 같은 품삯을 주어서 과연 포도원이 망했을까요? 오히려 더 흥했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반대로 가는 사람이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미국식 경영이 세상의 이치처럼 보이지만, 이런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를 거부한 북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히려 이 위기의 시대에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324)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마가복음 835)

 

이 위대한 가르침을 받아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내 자랑인 여러분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


 

어떤 조직이든지 바울의 가르침대로, 그 조직의 지도자가 매일 죽어야 합니다. 개신교 장로들이 날마다 죽어야 교회가 살고, 국가가 살아납니다.

 

개신교 장로들이여, 여러분은 악마의 맷돌인 자본의 논리를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사랑의 복음인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까?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이 여러분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관련된 글

  • 2009/06/19 존 러스킨_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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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최동석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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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ucandoit 2009/06/20 0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연히 와서 좋은 글 읽고 갑니다.
      한편으로는 인용하신 비유가 적절한 인용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심이 갑니다.
      제가 알기로 저 비유의 핵심은 나중에 온 사람들이 아니라 먼저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온 사람들을 '비정규직 노동자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통지를 받은 근로자들, 택배운송기사' 등에 대입하신 것도 어떤 기준인지 공감이 잘 가지 않습니다.

      한편 성경에는 위 비유와 유사한 달란트 비유와 함께 아래와 같은 말씀도 있습니다.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13:12, 마25:29, 막4:15, 눅19:26)

      그리고 조금 논외가 될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 아래와 같은 말씀도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곳으로 맞아들일 것이다." (눅 16:9)

      제가 위와 같은 성경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포스팅하신 내용의 성경 구절 인용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제 생각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글의 내용은 좋은 취지이나 성경을 저 구절을 인용하신 점이 오히려 저에게는 좋지 않은 인상이었습니다. (반박이 여지가 너무 많습니다.)

      • 최동석 경영연구소 2009/06/20 12:35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질문입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이 어째서 사회적 약자들로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지요? 내가 바르게 파악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다음 포스트를 썼습니다. 부족하지만 참조하세요.
        http://mindprogram.co.kr/238

        기독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워낙 다양해서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떠드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입니다. 해석의 논란이 있는 것은 가급적 피하지만, 명백한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성경을 인용했는데, 역시 약간의 논란을 일으키는군요.

        <달란트 비유>는 인간의 잠재력, 요즘 말로는 역량(competency)의 계발과 활용 등에 관한 비유로 해석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고난 독특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 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포도원 일꾼>과는 조금 다른 차원이지요.

        <불의한 재물>도 많은 논쟁이 될 수 있는 비유인데, 이것도 본 논지와는 다른 것이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질문 감사합니다. 덕분에 포스트 하나 더 썼습니다.

    2. 2009/12/07 15: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최동석 경영연구소 2009/12/14 1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 말입니다. 어려운 약자의 것을 빼앗아서 부자에게 주는 비유를 예수가 들었으니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 비유는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자든 강자든 누구든지 자신의 잠재력을 썩히면 안 된다는 의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능을 썩히는 자는 범죄행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실무에서 보면, 가장 안타까운 것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뭔가의 두려움과 편안함을 추구하려고 도전하지 않는 경우를 볼 때입니다. 노력하면 될텐데, 노력하지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실행해 보지도 않고 이리저리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 비유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한 달란트 받은 하인이 저주를 받은 것은 약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달란트를 활용하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것에 대한 마땅한 처벌이라고 보면 어떨까요? 아무튼 질문 감사합니다.

    3. 2010/11/19 2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2010/11/19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최동석 경영연구소 2010/11/20 1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저의 해석과 서 선생님의 해석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주장하시는 논지를 제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주장하시는 바를 제가 이해한대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천국에 관한 비유의 말씀을 지상의 비즈니스 비유로 해석해선 곤란하다?

        둘째, 노동의 댓가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첫째의 견해부터 보겠습니다. 지극히 옳으신 말씀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올바른 견해를 가진 기독교인들이 견해만 가지고 있을 뿐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실천이 없는 견해는 죽은 것이죠. 필리핀을 보세요. 그리고 남미를 보세요. 포도원 비유를 이땅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천국에 관한 비유의 말씀으로만 복음을 전파한 나라들은 한결같이 빈부의 격차로 나라꼴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의 비유를 이땅의 실제적인 삶의 구조로 전환시키지 못한 수많은 지역에서 처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요. 예수는 천국의 도를 전파하면서 이땅의 현실을 단 한번도 무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이땅의 비즈니스야말로 거룩한 행사, 즉 천국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즈니스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고, 사람들을 곤궁의 늪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천국에 관한 비유가 따로 있고, 이땅에 관한 비유가 따로 있다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거부합니다. 매우 안타깝게도 이땅의 개신교 목사들의 대부분이 이런 이원론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통해 이땅에 천국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이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마땅히 이런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개신교 장로들이 수많은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사회와 조직은 분열과 갈등, 부패의 구린내가 끊이질 않고 있잖아요.

        둘째의 견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도 지극히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도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선물로 값없이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마땅한 것이죠.

        그런데, 부자들에게 감세하는 부익부빈익빈 정책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난한 자들의 몫을 더욱 빼앗는 꼴이 되지요. 그래서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부자들일수록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구조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을 부자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갖죠.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선진국가로 가려면 반드시 고소득자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공정한 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자가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니까요. 그것이 바로 임금이 노동의 댓가가 아닌 값없이 받은 선물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지도층에 자리잡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렇게 귀중한 예수의 비유를 단지 비정규직이 다른 비정규직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전혀 영향력이 없는 원리로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부패한 기독교인과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온갖 세상의 권력을 차지하여 호가호위하면서, 진정으로 천국을 이땅에 건설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개신교 목사들과 비즈니스로 자신의 권력과 배만 채우려는 개신교 장로들이 문제입니다. 이것는 바로 기독교의 부패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 해석을 인간의 실제적인 삶에서 분리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기독교의 부패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논의에 관한 저의 다른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mindprogram.co.kr/238

    5. 2010/11/22 09: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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